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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생애"


베토벤의 생애


 

  "나의 사랑 - 나의 신념 - 나의 용기 - 나의 분노 - 나의 절망, 나의 두려움 - 나의 모든 용기 - 내가 경험했고 느꼈던 모든 것 - 지칠줄 모르는 이기심에 의해 내 음악에 흡수시켰던 모든 것 - 왜냐하면 내가 아는 언어라고 오로지 음악 밖에 없었기 때문에 - 아마도 모든 이러한 것들은 나의 것일 뿐만아니라 - 이것은 사랑이고 신념이고 모든 살아가는 사람들의 강인함일 것입니다."

 

  "생은 하나의 사소한 어려움입니다. 생은 인간에게 앞으로 나가기를 강요하고 스스로 앞질러 나갑니다."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베토벤의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의 한 근원으로서, 그의 삶을 따라가보는 것은 아주 의미있는 일이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음악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예술의 형식이란 측면에서 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작품을 동일시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고,  삶의 대척점에 예술 작품을 놓으려는 시도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술로서 창작된 것이라면 예술가 자신의 치열한 삶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삶의 의지와 예술 창작의 의지는 동반자로써 같은 길을 지나갈 것이다.

   최초로 베토벤에 관한 전기를 쓴 A.신틀러에 의해서 묘사된 베토벤의 인상. 평전에서 흔히 보듯 한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를 배제하고, 마치 그들은 태어날때부터 우리와는 다른 인간인 것처럼 영웅화시키기 쉽다. 베토벤의 사후에도 베토벤의 숭배자로서 비서를 자청했던 그에 의해 이런 빗나간 영웅화가 진행되었으나, 그후 베토벤의 음악에 심취한 사람들의 연구에 의해 그의 삶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했고, 오히려 그로서 베토벤의 영웅적 모습은 더욱 부각된 것이다.

  O.헨리의 「마지막 잎새」처럼, 척박하고 궁핍한 생활속에서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지켜가는 외롭고 창백한 천재적 예술가 상이란, 팽창해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빠져들어가던 낭만주의 시대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이전의 예술가들이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되어 신하 취급을 받았던 것과 달리, 시민계급이 성장한 이후 예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상승되었고, 신분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자신의 감성을 뿜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 세대에 속했던 모짜르트는, 신동이란 명성이 걷힌 후에야 그러한 예속상태를 뒤늦게 깨달았고, 너무나도 짧았던 그의 생은 이를 인지할 수 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에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예술의 상품화에 대한 반대급부라는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컬트(cult)니 하는 기이한 것에 머리를 처박고 최고 지성인인양 하는 오늘날의 저 삐딱한 예술적 취향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나 시대의 흐름을 앞서가거나 벗어난 전위적 예술의 흐름이 있어왔다. 하지만 기성의 권위나 상업성에 대항한 건강한 얼터네티브와 뒤틀린 욕망의 충족은 구별되어야 한다. 상품의 논리에 근거한 전위성과 차별화, 예술로 위장된 상품은 유행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다. 삶의 의지, 삶의 원천이 시작되는 진정한 미적 성찰에서 잉태된 예술만이, 올곧은 미래를 열 수 있는 것이다.

  베토벤은 소수 귀족들의 음악에서 일반시민으로 그 자신의 음악을 끌어내렸다. 하지만 그는 예술성의 희생을 담보로하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은 그 어느 음악보다도 예술적 성찰들로 가득했다. 역설적으로 그 당시 베토벤에게 대중적인 성공을 가져다준 음악은, 예술성을 뒤로하고 정치에 협잡하고 시류에 편승한 채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구시대적 봉건 왕정에 반기를 들고 유럽에 시민혁명의 의지를 전파하리라 믿었던 시민들의 영웅인 나폴레옹. 그가 혁명의 의지를 등지고  구시대 봉건제적 질서를 상징하는 황제에 등극하자, 이에 실망하여 3번 교향곡 "에로이카"를 나폴레옹에게 바친다는 헌정 표제를 뭉개버렸다는 일화도 있지만, 그는 한동안 여느 시민들처럼 나폴레옹의 승리에 찬가를 보내며 열광하였다.

  귀부인의 나들이 모자에 달린 꽃장식과 같이 가벼움을 즐기는 대중의 취향은 롯시니를 선호했으며, 이후 경쾌한 분위기의 월츠는, 혁명에 뒤 이은 복고적 반동정치 아래 있는 유럽 시민들을 무도회장에 묶어두는 역할을 했다.  귀족취향의 빈의 신년음악회는 요한 쉬트라우스의 월츠음악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지쟁탈과 함께 유럽에 유행한 이국적 취향의 풋치니의 [나비부인] 이나 [라 보엠] 이 보여주는 신파조의 과장된 모습보다는, 비제의 [칼멘]이 더 민중적인 음악이라 할 수 있다.


  F.니체가 통렬히 비판했던 맥락에서, 신흥 자본주의에 대해 막연한 반감을 가졌던 바그너는, 1차세계대전으로 치닫기 이전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자기 정체성의 모순에 가득찬 왕가와 구 귀족들,  그리고 신흥 브르죠아 시민들의 속물적 예술취향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의 위대한 업적을 창조해냈다. 바그너는 프리드리히 2세의 과대망상적인 과시욕을 이용하여 자신의예술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 결국 바그너의 정신적 한계도 여기에서 지워져 버리게 된다. 바그너는 그가 설계했던 총체적 예술인 '신들의 황혼'에서 악극의 모티브를 중세 게르만 신화에서 빌려왔지만, 중세 종교의 시대가 저물고, 근대 시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이데올로기를 전제로 시작하였다. 이를 사상적 매개로 하여 자유인을 꿈꾸던 니체와의 정신적 우정이 시작되었지만,  구 귀족의 후원에서 벗어나지 못한 바그너는 결국 신의 의지를 되살리는 것으로 젊은 시절의 욕망을 대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퇴행을 인정할 수 없었던 니체는 결국 바그너와의 우정에 결별을 고하고 만다.

  사람들 중에는 보다 나은 삶으로의 도약의 기회를 놓쳤거나,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채 일상에 묻혀 살아가는 인간이 있게 마련이다. 앞서 예를 든 「마지막 잎새」에 등장하는 늙은 화가가 그러한 예술가의 인상이다. 그들 중 가장 비참한 경우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예술적 충동에 비해, 이를 구체화시켜 표현할 능력을 적절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예술적 영감과 그들이 구현한 작품 사이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다. 그들은 현실과 타협하여 3류 예술가가 되거나, 무기력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베토벤의 아버지가 이러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고매한 인품의 할아버지와 달리, 그는 자신의 못다한 예술적 성취욕을 술로 달래며 어린 베토벤을 향해 난폭할 정도로 이를 내뿜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이런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들을 부양해야 했으며, 후에 그와 대립하게 되는 형제들이지만, 자신의 가족에 대한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였다.

  젊은 시절 베토벤은 피아니스트로서 실력을 인정 받으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넓혀가고 있었다. 환상적이고 격정적인 즉흥연주로 청중들을 전율케 한 그는, [교향곡 1번, 2번], [피아노 소나타 8번, 14번] 등을 발표하며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갖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빈의 상류사회에서 촌놈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주장했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로서 작곡가로서 한창 재능을 피울 때에 느닷 없이 찾아든 난청으로 삶의 중대한 위기를 맞는다. 그는 요양지 하일리겐쉬타트에서 유서를 쓰며 내면적으로 이에 투쟁하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고 난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을 필두로 [교향곡 4번 - 8번], [피아노 협주곡 4번, 5번],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현악사중주 op.59-1,2,3]등 그 자신의 음악세계를 열성적으로 구축해 나갔다.

  베토벤은 점차 약화되는 외부의 소리에 대응하여 인간 내면의 소리를 창조한 것이다. 그는 텁텁한 땀냄새 풍기는 선술집에서 들려오는 민요풍의 노래에서, 그리고 바람소리와 새 울음소리가 고요히 울리는 숲속을 산책하며 악상을 떠올렸고, 피아노 앞에서 거듭된 퇴고를 한 끝에 작품들을 완성해 나갔다.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을 아끼는 친구들과 귀족의 후원을 받으며 작곡을 했고, 평범한 여성이거나 귀족 여성들과 수차례 사랑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계속된 실연은 그에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단념하도록 만들었다. 안정된 후원을 보장했던 귀족들의 지원이 전쟁으로 인해 줄면서 그들의 무책임함에 실망하게 된다. 또한 형제들의 결혼 문제로 불화가 생기고 조카의 양육권을 둘러싼 분쟁에 휘말렸다.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고, 창작력마져 소강상태를 보이는 듯했다.
  때로는 바보스러울 정도의 순진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고 무례할 정도로 이에 대응 했으며, 자신만의 이상주의적 도덕관에 비추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불신하고 속물이라고 공격하는 고집스럽고 다소 괴팍한 성격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토벤의 순수함을 이해하는 친구들은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시기에 내면의 위기가 온것이다. 화려한 성공으로 삶의 회의와 분노를 보상받으려는 듯 했지만, 그 공허함을 채울 수는 없었다. 대중적인 성공에 대한 추구는 그가 조금전까지 열정적으로 즉흥 연주회를 열었던  귀족의 화려한 대저택이 한순간의 열기와 함께 차가운 바람속에 연기가 되어 사라져간 것처럼 꺼져버렸다.  그는 한동안 붉은 화염에 휩싸인 귀족의 대저택을 지켜보고 있었고,  차고 어두운 밤하늘에 덧없이 흩어지는 잿빛 연기속에서 한 세대, 한 시대의 끝나감을 예견하였다. 

  그는 다시 돌아와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교향곡 9번]과 [현악사중주곡 12번 - 16번] 에서 이전보다 더 초연한 자세로 인간의 삶을 묵시하고 있다.
  음악가로서 난청이 주는 불안과 고통, 잇따른 연애의 실패 등으로 인해 삶의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세계로 침잠한 베토벤. 이러한 좌절과 보답없는 자기 희생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간다면, 시련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삶이 주는 기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영웅일 것이다.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살아있음을 당당히 알렸다. 젊은 시절 거부하고 싶었던 자신의 운명에 극적으로 투쟁하는 모습의 [교향곡 5번]은, [교향곡 9번]에서 숙명적이라고 해야할 삶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을 통해 원숙함으로 다가선다.

  현실의 고뇌와 숙명이 숨쉴수 없이 몰아치는 자연의 폭풍우처럼 먹구름과 비와 천둥번개를 몰고 간뒤에 (1악장), 그 한가운데서 버티고 나선 한 인간의 실존적 생의 의지가 강인한 힘으로 돌진해온다 (2악장). 이윽고 이에 상응하는 내재적 이상과 사랑으로서 신에 대한 간절한 기원이 천상으로 향하며 (3악장), 마지막으로 자연과 인간과 신의 합일로서 생의 환희에 이르는 것이다 (4악장). 이는 "고뇌를 뚫고 환희에 이르라" 는 그의 일생의 모토를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숨쉴틈 없이 거세게 몰아치는 폭풍우속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한 인간의 강인한 의지. 그리고 그 끝에서 신의 고요함 속에 안긴다. 하지만 그는 다시 천상에서 지상으로, 불행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손을 부여잡기 위해 내려온다. 상처투성이인 베토벤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성격적으로 다소의 부족함이 있는 그였지만,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다. 전쟁중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비탄에 잠겨 눈물마져 말라버린 한 여성을 위해, 영혼을 뒤흔드는 피아노 연주로서 그녀의 닫힌 마음을 열게한 베토벤이었다. 바로 그 연주가 [피아노 소나타 28번]으로 그녀에게 헌정되었다. 베토벤은 알바트로스라는 거대한 새의 상징처럼 무겁게 내리누르는 심연에서 솟아올라, 빛나는 날개로 힘차게 떠오른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삶의 계시를 들려준다. 

  베토벤, 그는 자연과 인간과 신을 어우러 인간의 목소리로 생의 환희를 연주하고 있다. [교향곡 9번]에서 쉴러의 시 "환희의 송가" (Ode an die Freude) 가 노래되기에 앞서, 최초로 인간의 목소리는 이렇게 외친다

    오 환희여, 더이상 이런 음조는 아니다.
    더욱 즐거운 노래를,
    환희에 가득찬 노래를 부르자!

  20세기 최대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칼빈과 모짜르트의 초상화를 함께 걸어두었지만, 베토벤의 음악은 한때 교회에서 공식적인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 끝에 금욕주의로 돌아선 톨스토이가, 격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만드는 베토벤의 음악을 멀리하려 했던 이유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주 1)   하지만 이는 그의 음악의 한 측면일 뿐이다. 베토벤은 자신의 음악을 이해한 사람은 남들이 질질 끌고 다니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자유정신의 초인을 이야기하는 니체가 베토벤에 주목하지 못한 이유는 동시대인이었던 바그너의 영향이 너무 컷던 탓이 아니었을까. 베토벤이 [교향곡 7번]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감흥으로 노래하고 있지만, 니체는 천진난만한 모짜르트의 선율을 더 선호한 것 같다.주 2) 니체는 베토벤의 음악을 18세기 시민 혁명의 열광과 이의 좌절된 이상으로 파악했다.주 3)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를 여는 계기가 된 베토벤의 음악 그 자체나, 시련과 극복이라는 그의 극적인 삶을 떠나서, 이러한 시각은 사상사적인 면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주 4) 이미 모짜르트나 베토벤은 빛 바랜 기억으로 잊혀져가는 시대였고, 이루어지지 못한 아픈 사랑처럼 과거의 혁명적 열정을 떠올리게 하는 고뇌에 찬 베토벤 보다는, 어릴적 천진난만함과 첫사랑의 아련함을 간직한 모짜르트가 더 가슴을 울릴 것이다. 베토벤이 제10교향곡에서 지상(근대)과 천상(고대)의 융화를 모티브로 했지만 미완으로 남겨졌고, 이후 서구문화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맹목적 열정에 휩싸인 낭만주의의 시대가 된다.

  F.니체는 "디오니소스"란 고삐 풀린 열정의 정신이 아니며, 고통과 공포를 감내하는 생에 대한 긍정의 상징이라 하
였다. "문제는 고통의 의미이다. ......비극적 인간은 가장 혹독한 고통도 긍정한다." (「힘에의 의지」) 육체적,정신적 고통속에서도 냉소주의나 환락에 빠지지 않고 삶을 긍정으로 이끌어내는 니체의 초인적 의지는, 베토벤이 자신의 목소리로 표현한 음악과 삶 자체이다.

주 1) L.톨스토이, 「크로이쳐 소나타」

주 2) F.니체, 「선악을 넘어서」- §245
주 3) F.니체,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 여러 의견과 격언 - §7
주 4) 프레드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 '제1장 T.W.아도르노-혹은 역사적 비유들'



이 글은 초안입니다 (1999). 인용 및 배포를 삼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This paper is a draft version (1999), please do not quote or distribute.
 Copyrighted by Kim Yun-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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