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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of Science

"실재론이란 부당한 단어인가?" (번역)


  Is Realism a dirty word?



    때때로 철학자는 신용할 수 없는 강한 오만함에 빠져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라고 프로타고라스는 (Protagoras) 얼마나 애매하게 표현 했는가. 주로 독일에서 몇몇의 철학자들은 우주의 최고의 존재자가 인간의 마음에 의존하는 것으로 상상할 만큼 오만함의 극치에 달해있다. 단지 우리의 변화하는 인식들만이 실재이다.  만약에 우리가 없어진다면, 우주는 구조가 없는 안개 속으로 용해될 것으로 추정되거나, 아마도 모든 존재가 없어지거나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장들의(fields) 구조와 입자들의(particles) 구조로서, 과학과 수학의 법칙은 “외부”에 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정신의 자유로운 창조물들이다.

연약한 우리의 두뇌를 보는 대신, 보편적 법칙에 따라 춤을 추는 짧은 생명주기의 원자 앙상블들을 보라. 이 기묘한 관찰은 실재로 물리법칙을 탐구하는 우리의 두뇌가 관찰하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우주는 구성적이다. 톰슨은 (J.J.Thomson) 전자를 발견하지 않았다. 그는 전자를 창조해냈다. 아인쉬타인은 (A.Einstein) 상대성이론을 발견하지 않았고 만들어 냈다. 그러한 구성물들이 과거의 관측이나 예측된 미래의 관측을 그렇게 성공적으로 설명한 사실은, 문화적 유아론자들에게 (cultural solipsist) 있어서는 신기한 마술과도 같은 신비스러움으로 다가왔다. “수학의 이해할 수 없는 효과 (The Unresonable Effectiveness of Mathematics)” 는 위그너 (E.Wigner) 의 가장 잘 알려진 논문의 제목이다.

현재 그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철학자는 특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몇몇의 형이상학자들이 그것을 방어하지 못할 만큼 그렇게 기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근래에 다수의 물리학자들이 뉴튼과 아인쉬타인의 실재론을 거부한 것이다. 영국의 물리학자 폴 데이비스는 (Paul Davies) The Encyclopedia of Delusions 의 기고문에 “이 논문의 목적은 실재가 우리의 외부에 존재한다는 환상을 거부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썼다. 천문학자 브루스 그레고리의 (Bruce Gregory) “창조된 실재: 언어로서의 물리학 (Inventing Reality: Physics as a Language)” 의 주제는 실제로 책의 표지에 쓰여있다. “물리학자는 물리적 세계를 발견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리적 세계를 창조한다... 시인 루키져가 (Muriel Rukeyser) ‘우주는 스토리들에 (stories) 의해 만들어지지 원자에 의해 만들어 지지 않는다.’ 라고 표현한 것처럼”

10여년간 휠러는 (J.A.Wheeler) 지각력 있는 생명체는 조그마하고 오래된 지구를 제외하고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 했다. 만약에 우주 그 자체가 우리에 의해서 관측되는 것이 허용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실재의 가장 미약한 종류일 것이다. 그는 단언한다. “양자역학은,”... “우주가 외부에 존재한다는 관점을 파괴시켰다.” 윌젝크는 (Frank Wilczek) 최근의 서평에서 휠러를 존중하여 의례상 다음과 같은 소견을 언급하였다. “물리학에 대한 휠러의 기술적인 기여의 중요성은, 다른 것에 기원한 그의 진술에 중요함을 부여하기 위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휠러의 사회적 유아론 (social solipsism) 으로부터 과학이 외재적 법칙의 점진적인 더 나은 이해가 아니며, 음악이나 회화와 같은 문화적 창조물이라는 서술은 매우 근접해 있다. 의류의 패션과 같이 장소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으로 경쟁적인 과학이론들은 “통약불가능”하다. 한 나라의 교통규칙이 다른 나라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는 참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는 주로 역사주의자 토마스 쿤과 (Thomas Kuhn) 철학자 페이어아벤트를 (P.Feyerabend) 지지하는 것으로 기대되는, 문화적 상대주의 (cultural relativism) 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사회과학자에 의해 주장된 관점이다.

뉴 에이지의 (New Age) 넌센스와 어떤 환상적인 동양종교라고 말하는 것에 영향을 받은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의 “측정 문제”에 있어 반실재론을 (antirealism) 강하게 주장하는 것을 발견한다. 한 입자의 특성은 입자들의 파속이 수축되고 입자들이 “확정적”이 되기 위한 특성들이 허용되는 것으로서, 그 입자가 측정된 기구와 상호간섭하기 이전까지 그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측정기구를 포함한, 모든 물질적인 것은 입자들의 앙상블들로, 그것을 누군가가 관측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인식된 것이다. (To be is to be perceived.)” 라고 버클리는 (G.Berkeley) 말했다. 그러나 사려 깊은 이 아이슬랜드의 주교는 허용된 신이 그것을 관측한다는 것에 의해 관대하게 외부세계를 복원하였다. 신에 관해 언급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문화적 유아론자들은, 휠러가 “참여적 우주”라고 부르는 것에 남겨진다. - 실재는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참여에 의존하고 있다.

전자가 (electron) 관측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우주가 관측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추정할 수 있는가 ? 그렇지 않다. 많은 사물들이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 관하여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린 침팬지가 상상하는 것처럼, 거울에 비친 영상은 거울의 뒷면에 존재하지 않는다. 거울앞에 있는 두 사람은 동일한 반영을 보지 못한다. 거울은 빈방에 있는 어느것과도 같지 않다. 그것은 잘 확정된 방이나 거울, 탄성력있는 광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아니다. 무지개는 관측자에 의존한다. 두 사람이 동일한 무지개를 볼 수는 없다. 색깔의 호란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잘 확정된 태양이나 햇빛, 빗방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아니다. 더우기, 무지개나 거울의 영상은 인간의 관측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약한 카메라가 경탄할 만하게 사진으로 찍는다.

전자는 관측자가 부주의하게라도 관측을 하지 않는 한 어떻게도 - 어느 누구도 어떻게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위그너와 몇몇의 초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이 그것을 보기 전까지, 그것은 측정장치의 미시적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극히 복잡한 방식으로 상호간섭하는 양자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무의 부러지는 소리가 우리의 두뇌에 감각되는 것은 나무와 압축된 파들이 우리의 두뇌 내부에 존재하는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은 단일한 새로운 형이상학적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가 창조되었는가 아니면 전적으로 우주 그 자체에 의해 전개되었는가와 같은 고대의 미해결의 문제에 관한 것으로, 만약 모든 정신들이 소멸한다면 그것이 진행될 수 있는가, 또는 왜 무 (nothing) 라기 보다는 양자장이 존재하는가 라는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에 당신이 감성적인 이유에서나 몇몇의 도사들이 말한 것 때문에, 당신은 우주에서 필수적인 존재이며, 달은 그것을 보기 위한 우리의 마음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인쉬타인이 묻기 좋아한, 생쥐의 마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당신은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광기에 빠져있는 것이다.

실재론이란 부당한 단어가 아니다. 만약에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과학자,철학자,일반사람들이 뻔뻔스러운 실재론자였으며 실재론자라면 왜 그런지 당신은 내게 말해주어야 한다. 압도적으로 확증된 과학적 추측이란 없다. 모든 사진에 나타나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나선과, 왜 모든 전자들은 동일한가, 왜 물리법칙은 도쿄나,런던이나 화성에서 동일한가, 생명이 전개되기 이전에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모든 생명이 죽는다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왜 모든 사람은 눈을 감을 수 있으며, 6면체에서 8개의 모서리와 6개의 면과 12개의 변을 감각하는가, 아침에 일어 났을 때 왜 당신은 침실에서 동일한 것을 보는가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제공하는 가설들은 실재론 외에는 없다.

Martin Gardner

American Journal of Physics 57(3), March 1989, p.203.  에서 번역
(translated by Kim Yun-Ki)